Being-with
루시드폴 Ambient album
살아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루시드폴의 두 번째 앰비언트 앨범
는 현존하는 다양한 소리들을 재료 삼아 만든 다섯 편의 음악 모음집이다. 사람의 소리는 물론, 바다 속 생물과 풀벌레, 미생물 소리, 공사장의 굉음 등 주변의 갖가지 소리들로 만든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각 곡들은 모티프의 ‘반복 없는 반복’을 통해 새롭게 조형되고 서사가 부여되며 생명력을 갖춘다. 소리가 음악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Ambient' 그 자체의 의미대로 우리 주변을 은은하게 둘러싼 소리들과의 ‘공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는 첫 번째 앰비언트 앨범 의 마스터링을 담당한 독일 엔지니어 Schwebung Studio Stephan Mathieu가 다시 한번 마스터링을 맡아 섬세한 사운드를 완성시켰다.
[Credit]
All sounds were created or captured by Lucid Fall
Mastered by Stephan Mathieu at Schwebung Mastering
[ Liner’s Note & Tracklist ]
《Being-with》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위한 찬가입니다. 수많은 이들의 소리를 재료 삼아 만든 다섯 편의 음악 모음집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소리는 물론, 바닷속 생물과 풀벌레, 미생물이 내는 소리로 만든 곡도 있고, 공사장에서 담아 온 온갖 굉음으로 만든 곡도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네는 연대의 음악도, 삶과 죽음 너머로 흩어진 영혼을 진혼하는 곡도 들어 있습니다.
《Being-with》는 크게 듣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이, 마치 소리 향초처럼 듣는 이의 공간을 채워준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아주 적요한 곳에서 내가 만든 소리 하나하나에 귀 기울여준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기쁩니다. 어떻든 이 음악이 누구의 귀에도 거슬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Being-with》를 굳이 규정한다면 미니멀 음악(minimal music)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티프(motif)의 ‘반복 없는 반복’이 앨범을 관통하는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Being-with》에 수록된 곡들을 소개합니다.
01. Mindmirror
‘Mindmirror’는 ‘마음거울’을 뜻합니다. 나는 누구나 마음속에 거울을 품고 있다는 상상을 합니다. 마음거울이 탁하면 세상이 탁하게 보일 겁니다. 오목한 거울로 보면 세상은 오목하고, 볼록한 거울에 비친 세상은 볼록하겠지요.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지향성(intentionality)과 비슷합니다.
는 스물네 개의 음으로 만든 멜로디에,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의 작곡 기법인 틴티나불리(Tintinnabuli)로 화음을 붙인 곡입니다. 곡을 이루는 여덟 마디 모티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데 아주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음높이가 변해갑니다. 같은 건반을 눌러 나온 소리라 해도, 악기의 ‘마음거울’이 달라지면 음높이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울이 비틀리면 거울에 맺힌 상이 비틀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악기의 마음거울은 바로 ‘조율’입니다.
이 곡은 평균율을 거부합니다. 피타고라스 조율로 시작되다가 점점 다른 조율과 뒤섞이며 음높이의 경계도 유유히 움직입니다. 썰물이 밀물로 변하고 다시 썰물이 되듯, 단조로 들리던 멜로디가 장조로 변했다가 다시 단조로 돌아옵니다. 그 사이에는 불협화음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에는 단조와 장조의 분별이나 협화음, 불협화음의 규칙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분 음악microtonal music이기 때문입니다. 의 미분음 멜로디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인간이 나눠놓은 열두 개의 음 ‘사이’에서 드넓은 소리의 영토를 자유롭게 훑어갑니다.
는 ‘사이’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입니다. 또한 세상의 숱한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이를테면 M과 F 사이에 존재하는 L, G, B, T, Q, I, A, 혹은 그 이상+의 이들―에 대한 음악적 연대이기도 합니다.
02. Aviiir
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음악을 샘플링해서 8배만큼 길게 늘어뜨리고, 해체하고, 재조립해서 만든 음악입니다. ‘Aviiir’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아리아(aria)’를 뜻하는 영어 단어 air의 i(1) 대신 로마 숫자 viii(8)를 끼워 넣은, 말놀이라고 할까요.
의 재료가 된 음악은 1942년에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가 연주한 바흐의 곡 입니다. 80년을 건너온 이 위대한 연주를, 마치 빵 반죽처럼 늘어뜨리고 주무르다 보니, 아름다운 현악기 소리가 장중한 합창단의 노래처럼 변해갔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소리의 재탄생을 바라보던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소리도 발효되는 건 아닐까.’
빵 반죽이 부풀어 발효되며 온갖 향미가 생기듯, 소리의 시간도 부풀어 올라 전혀 다른 소리맛이 생긴 건 아닐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여러 개 모티프를 하나씩 꿰어가다 보니, 원곡과 전혀 다른 스토리가 만들어졌습니다.
03. Microcosmo
음악가 시모어 번스타인(Seymour Bernstein)은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영혼의 저수지(spiritual reservoir)를 품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소우주(Microcosmo)라고 부릅니다. 자연을 말할 때, 흔히들 광활한 바다나 울창한 숲, 강과 폭포 같은 웅대한 풍경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나는, 함께 있는 이들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자연’ 혹은 ‘자연임’을 경험합니다.
는 수중 마이크(hydrophone)로 녹음한 바닷속 소리로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곡의 뼈대는 1/4인치 릴 테이프에 녹음한 로즈(Rhodes) 피아노 소리인데, 40년 가까이 독일 어느 공장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녹음기로 녹음한 것입니다.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일일이 면도칼로 잘라 끝과 끝을 이어 루프(loop)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60년대 미니멀리스트들의 작업 방식과 비슷합니다.
모든 루프는 음높이도 다르고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다 다릅니다. 태양을 도는 여러 행성처럼 각자의 리듬에 맞춰 돌다, 우연한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루프가 돌아갈 때 손가락으로 테이프를 밀고 당기며 소리를 변주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날로그 세계, 즉 테이프 루프로만 가능한 미묘한 ‘연주’입니다. 이렇게 반복 없이 반복되는 소리를 쌓고 쌓은 뒤, 재래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리, 미생물이 발효하는 소리, 풀벌레의 합창 소리가 모여들어, 또 다른 서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04. Mater Dolorosa
이 곡은 2022년 제주 아트 페스타에 출품한 를 재구성한 곡입니다. ‘Mater Dolorosa’는 ‘고통받는 어머니’를 일컫는 라틴어 단어입니다. 당시 도록에 실린 글과, 책 『모두가 듣는다』에 실린 글 일부로 소개를 대신합니다.
“는 포클레인 소리, 그라인더 소리, 철근 떨어지는 소리, 육중한 중장비 소리 등 공사장에서 채집한 굉음으로 만든 곡입니다. 제주에서 자란 어느 아이는, 제주를 떠올리면 포클레인 소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제주는 언제나 공사 중입니다. 중산간도 그렇고 바닷가도 그렇습니다.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개발의 소음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공사장의 거친 소리를 모아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소리는 사실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곡은 거친 소리를 강요하는 세상에 대한 음악적 저항입니다.”
“자연에도 극단이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극단은 대부분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인간은 극단적으로 단단한 물질을 극단적으로 날카로운 도구로 다뤄 극단적인 소리를 만들어낸다. 사운드 아티스트 야나 빈데렌(Jana Winderen)의 말대로 소리가 가장 비물질적인 물질이라면, 극단적인 소리 역시 인간이 만든 물질이다.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난폭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함께 살아가는 나무와 풀꽃 그리고 어딘가 숨죽이고 있을 동물들이 마음에 밟혔다. 나는 우리가 사는 지구, 바로 그 고통받는 어머니(Mater Dolorosa)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05. Transcendence
사랑하는 가족이 먼 곳으로 떠난 날, 우리의 마지막 공간을 채워주었던 곡입니다. 원곡은 10분 안팎의 짧은 곡이었지만, 한 시간 길이의 곡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워낙 긴 곡이라 LP에는 담을 수 없어 디지털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으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는 여러 가지 사운드를 중첩해 만든 곡입니다. 그래뉼러 신서시스로 쪼개 만든 소리를 중심으로, 각종 신시사이저와 가상 악기를 여러 겹으로 포개어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소리 요소는 각기 다른 주기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끊임없이 변하지만 또 제자리에 있으면서 제각각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렇게 정확히 한 시간 동안 이어지는 소리 서사는,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소리가 소리를 만남으로써 때론 증폭되고 때론 간섭하며 만들어낸, 우연의 서사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단 한 번도 같은 순간 없이 무한히 진화하는 사운드스케이프는, 내가 궁극적으로 탐구하고 음악화하려는, 대자연의 ‘반복 없는 반복’을 음악적으로 모사해 낸 결과물입니다.